[대추리에 군병력?]우리 제발 괴물은 되지 맙시다

우리가 대개 비열한 인격을 지칭할 때에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강자에게 가끔가다 약하게 하는 것까지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부분도 있지요.
한데 약자에게 오만방자하게 꾸는 것은 그 문제의 성질이 전혀 다릅니다.
피해자가 안되려고 뭄을 움츠리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가해자로 나서기 때문이지요.

우리 정부의 대미 관계 전개의 구도를 보면
이 두 가지가 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듯한 인상입니다.
강자 미국 앞에서 드디어 좀 떳떳해지겠다는 약속들을 국내용으로 아무리 해도
실제로는 한 없이 – 필요 이상으로 – 약하게 나서고,
이에 대해 어떤 보상을 받는 듯 미국의 피해자들,
즉 국내의 약자들에게 한 없이 위압적이지요.

이라크에다 파병한 뒤에 약자 김선일을 죽게 놔둔 것도 그렇지만
이번에 평택 대추리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우리가 정말 “지역적 균형자”가 되겠다면
지역 역학 관계의 한 축이 또 다른 축을 공격하기 위한 초대형 군 기지를
자국 내에서 건설하게 허락해주고
거기에다 “전략적 유연성”, 즉 침략적 행위에의 영토 제공을 약속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지금 돌이켜 보면 ‘균형자론”은 반은 “했으면 좋겠다”는 미래형 희망 사항이었고 반은 국내용 수사였으며,
평택 기지와 “전략적 유연성”은 대한민국의 대미 관계의 진실이지요.

1271-74년에 원나라가 찍어내린 대로 김방경의 군이 먼저 국내 저항 세력 (삼별초)을 초토화하고
그 다음에 승산이 없는 대일본 침략 (“일본 정발”, 지금도 교과서에서 그렇게 쓰나요?)에 나서게 된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자국 이익을 도모하려는 마음이 지배자들에게 있어도
궁극적으로 패권 국가의 명령을 “감히” 거역할 생각을 못하는 판이지요.
그런데 강자에게 이 정도로 굽실거려도 약자에 대한 태도는 180도로 다르지요.
요즘 대추리에 군대를 투입하여 “주민들의 영농 차단에 힘을 다하겠다”
(모내기하는 농민들을 쳐부쉬는 것도 국방의 목적이군요…)고 하는데,
자국 내에서 자기 땅이 침략의 기지 건설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약자들에게
“군 병력 투입”을 들먹이는 것은 민주 사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입니까?

물론 미국 역사 같으면 꽤나 볼 수 있지요.
1932년6월에 보상금 지급을 요구하는 제1차 대전의 상이병들이 워싱턴에서 연속적으로 데모하자,
우리에게 그렇게도 잘 알려진 맥아더가 군대를 지휘하여 그들을 “군사적으로 격파”했지요.
두 명의 상이병을 죽이고 몇 명의 아이들을 최루탄으로 질식사시키면서….
한 마디로 자유공원에서 동상 세울 만한 위대하신 영웅임에 틀림없지요?
그런데 미국이 민주국가라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우스운 – 또한 위험한 – 착각일 것 같아요.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이 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서유럽을 보면
민간 사회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병력 투입의 사례를 거의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친일의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한다 하면서 또 무슨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고 있습니까?
그리고 민간인들의 정당한 생존권 투쟁을 탄압하기 위해 늘 투입될 수 있는 군대라면
정말 그 군대에서 복무한다는 것은 “신성한 의무”인가요?